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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통증', 너무나 짧았던 사랑의 순간

NeoTrois 2019. 2. 28. 16:35

영화 <통증>은 세상과 연을 맺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자들의 인연과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입니다. 강풀의 원작을 부산 촌놈 곽경택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우직한 부산 사나이들의 세계만을 줄곧 그려온 곽경택이 어쩐 셈인지 <통증>에서는 서울에서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는 또 타인의 원안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는데 <통증>에서는 강풀의 원작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친구>(2001)와 <사랑>(2007)으로 대표되는 곽경택의 인생관은 <통증>에서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이어집니다. 곽경택의 이야기들은 그 시작과 끝이 같아 단조롭습니다.

그 단조로움 속에서 삶을 관통하는 비애를 우직하게 뽑아내는 것이 곽경택 영화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통증>의 주인공 남순은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자괴감에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무통각증 장애를 앓게 됩니다.

남순은 소년원에서 만난 범노(마동석)와 사채이자를 갈취하는 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의 무통각증을 이용해 채무자들 앞에서 끔찍한 자해행위를 실연하여 돈을 받아 냅니다.

남순은 동현(정려원)과도 그렇게 만납니다. 동현에게 사채이자를 받기 위해 남순이 벽돌로 자신의 손을 내리치는 순간, 둘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동현 역시 세상에 발 붙일 곳 하나 없이 홍대에서 악세사리를 팔면서 근근히 살아갑니다. 그녀는 남순과 정반대되는 혈우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어떠한 육체적인 상처에도 고통을 느낄 수 없고, 한 사람은 아주 조그만 상처에도 크게 고통 받는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상반된 장애를 앓고 있는 두 남여가 과연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거기다 두 남여는 세상속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까치발로 겨우 버티며 외진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사랑은 그들에게 너무 사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동현이 남순의 진정을 알아보고는 교회에서 한정 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관객들도 둘의 사랑이 여느 사랑들처럼 행복하기를 빌어주고 싶어집니다.

세상과 건강한 연을 맺지 못한 그들이지만 그들도 그 흔한 사랑 하나쯤은 할 자격은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곽경택 감독은 둘의 정사를 360도 회전하는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그 순간만큼은 둘은 여느 연인들처럼 달콤한 섹스를 하고 사랑의 뜨거운 감정이 충만해 보입니다. 그런데 감독은 어쩐 심산인지 그들의 사랑을 원형으로 한 바뀌 도는 편집 화면으로 영상화 합니다.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남순은 세상과 연을 맺고 세상에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 합니다. 동현은 사채와 연을 끊기 위해 통증을 못 느끼는 장애를 활용하여 촬영장 엑스트라로 직업을 바꿉니다.

남순과 동거를 시작하고부터 동현도, 자신이 과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애뜻한 사랑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섹스 장면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통증>의 마지막 시퀀스는 여전히 세상속으로 진입하지 못한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비애가 어떤 것인지 클로즈업 합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사랑의 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동현 역을 맡은 정려원은 <통증>에서 가장 좋은 연기를 보였습니다. 정려원의 영화는 <적과의 동침>(2011)과 <김씨표류기>(2009), 단 두 편을 봤을 뿐이지만 <통증>에서 그녀의 슬픈 눈빛은 극중 캐릭터와 잘 어울렸습니다.

혀가 짧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권상우는 자신의 대표작 <말죽거리 잔혹사>(2004)를 넘어서는 연기는 보여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포화속으로>(2010)에서 보여준 연기 보다는 훨씬 좋았지만.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정신적인 무통각증을 앓고 있지나 않은지 두렵습니다.


극중 정려원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절대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가 모두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면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 의하면 그녀는 '원인 착각'의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원인 착각은 우연한 일치에서 인과관계를 추론하여 앞서 일어난 사건이 뒤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믿게끔 우리들의 뇌가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화속 정려원이 겪고 있는 원인 착각은 인과관계가 명백하여 관객들도 그녀가 착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 착각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수 없이 겪고 있는 '일상의 착각' 중의 하나입니다.

원인 착각은 언론의 헤드라인이나 광고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성적인 음악이나 폭력적인 영화, 게임에 노출된 십대가 뒤에 성관계를 갖거나 폭력적이 되기 쉽다는 주장도 원인 착각의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