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장편소설 『공무도하』의 표지는 독특합니다. 작가의 원고지를 겉표지로 삼았는데, 연필을 꾹꾹 눌러 쓴다고 한 작가의 필력이 느껴집니다. 아직도 워드가 아닌 원고지를 쓰다니 우직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와 <남한산성>(2007)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역사소설이 아닌 소설에서는 작가의 문장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화가가 되었다면 아마도 추상화가가 되었을 것 같네요. 그 만큼 그의 문장은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공무도하>는 불가능한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는 이야기의 얼개도, 목차도 없습니다.
주인공 문정수 기자가 신문 사회면에 실릴만한 소재로 이야기를 끌어 갈 뿐입니다. 문정수는 가끔 출판사에서 일하는 노목희를 찾아가 섹스를 하곤 합니다.
문정수가 만나는 사람들이 등장인물들인 셈인데, 소방관 박옥출, 개에게 물려 죽은 아이의 어머니 오금자, 지방대를 나와 어쭙잖게 노학운동을 하던 장철수, 베트남에서 시집온 후에, 그리고 노목희가 번역하는 "시간 너머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입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은 비루하고 치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작가의 말대로 던적스럽기까지 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들을 사회부 기자처럼 서술합니다. 숫자가 뒤섞인 작가의 문장들은 흡사 보고서 같습니다.
사다리는 기립각 69도를 이루었다. 인명구조특공조와 파괴수들이 고가사다리를 타고 7층 옥내로 진입했고 관창수들은 수관을 연결해가며 중앙계단을 따라 진공했다.
- 김훈, <공무도하>(문학동네, 2009) 98쪽
던적스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소설 속 공간은 작은 바닷가 마을 '해망'과 경주에서 가까운 '창야'입니다. 굳이 현실에서 찾자면 해망은 평택 쯤이고 창야는 창녕 쯤입니다.
그러나 창녕군에는 호텔도 지방대학도 없습니다. 작가는 서울은 그대로 쓰면서 지방도시는 관념적으로 창조했습니다.
작가의 문장은 노목희와 문정수의 섹스를 묘사한 장면에서는 멀고 아득한 관념의 강으로 변합니다. 정사를 묘사하는 문장에서조차 작가는 사실적이기를 포기한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김훈의 문장은 흡인력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얼개가 없음에도 무엇인가가 끌어당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습니다.
<공무도하>를 읽으면 우울해집니다. 삶이 비루해지고 치사하게 느껴집니다. 힘에 부대끼는 작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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