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장편 소설 <고래>는 몰입도가 높다. 다 읽기 전에는 책을 놓기 어렵다. <고래>가 지닌 이야기의 힘이다. 국밥집 노파와 금복 - 춘희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인의 삶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작가 천명관은 영화 연출의 꿈을 갖고 시나리오를 들고 10년 동안 충무로에서 낭인 생활을 했지만, 영화는 끝내 만들지 못했다.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썼고, <고래>로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영화 <총잡이>와 <북경반점>이 그가 쓴 시나리오이다. 기존의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영화적 잔혹미는 그의 오랜 이력을 말해준다. 영화 <고령화 가족>도 그가 원작자이다.
산골 소녀 '금복'이가 생선장수를 따라 고향을 떠나 전전하다 평대라는 소도시의 기업가로 성공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세상을 떠도는 자들의 시끌벅적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풍문이자, 판타지이다. 지난 세기의 천태만상이기도 하다.
금복은 먼 바닷가에서 시작되어 산을 넘고 계곡을 돌아 그녀의 마을에 도착한 한 줄기 바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 몰래 생선장수를 따라 길을 나선다.
파란만장한 금복의 일대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밤새 길을 달려 바닷가에 도착한 금복은 고래를 생전 처음 보았고, 그 고래는 금복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소설마저도 압도하게 된다.
<고래>에는 코끼리가 나오고, 거대한 양물을 지닌 반편이가 나오고, 힘이 장사인 '걱정'이 나온다. 그리고 금복은 급기야 '걱정'을 닮은 '춘희'를 낳고, 그 딸은 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로 자란다.
작가는 금복의 입을 빌려 크기에 대한 세상의 온갖 견해들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 글쎄, 크다고 뭐 딱히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이왕지사,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큰게 좋겠지.
<고래>는 비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들이다. 박색 노파의 딸은 애꾸눈이고, 금복의 딸 춘희는 말을 못 하고, 금복의 서방 칼자국은 손가락이 다해서 네 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우리들의 주인공 금복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모든 수컷들을 단숨에 욕정에 들뜨게 하고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뇌쇄적인 향기를 발산하는 여자이다.
작가 천명관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 그 허망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 마침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된, 여느 합궁에 대한 소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비정상적인 신체들의 에피소드와 함께 <고래>에다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놓았다.
화자는 때론 변사가 되기도 한다. 칼자국에 대한 화자의 소개를 잠시 들어 보자.
칼자국이 등장할 때마다 이 소개는 매번 되풀이 된다. 정신박약아인 춘희의 애인 트럭 운전수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납니다.
-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그런데 추임새같이 반복되는 이 문구들을 계속 만나도 지루하지 않다. 조각조각난 이야기들로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치밀한 구성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의 리듬을 살려주는 장치가 된다고나 할까? 시간을 나타내는 그날 밤, 때는 바야흐로, 그날, 어느 날, 그해 가을 등으로 시작해서 그것은 무슨무슨 법칙이었다고 마무리 짓는 문장들도 옛것에 대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모두 기이하고도 잔혹하게 죽인다. 등장인물들이 어이없게 죽는 장면들은 잔혹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죽은 등장인물들은 유령으로 다시 돌아온다. <고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들며 기존 소설의 양식에 도전한다.
한 편의 복수극이라는 작가의 말대로 <고래>의 긴 이야기들은 국수집 노파의 복수심에 의해 시간은 조율되고 사건들은 조작된다. 작가만의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사후의 세계에까지 나아간 <고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정상성으로부터 억압받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독자의 가슴속에 환생한다. 소설 <고래>가 지닌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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