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투자전쟁, 헤지펀드 사람들의 영광과 좌절

NeoTrois 2019. 4. 13. 15:20

<투자전쟁-헤지펀드 사람들의 영광과 좌절>(바턴 빅스, 휴먼앤북스, 2006)은 저자가 모건 스탠리에서 헤지펀드를 운용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유려한 문체로 이야기한 책입니다.

바턴 빅스는 헤지펀드를 처음 시작했던 1965년 6월 첫날 오후에 마이너스 5%의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위장에 구멍이 생겼다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바턴 빅스는 헤지펀드를 죽기 아니면 살기, 둘 중 하나의 결론 사이에서 벌이는 필사적인 모험이었다고 말하는데요, 투자전쟁이나 다름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사람들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쳐다봅니다.

그들은 세계 금융시장을 교란시키고 순진한 투자자들을 약탈하는 탐욕스럽고 사악한 돼지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헤지펀드의 세계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턴 빅스의 <투자전쟁>을 집어들어도 좋겠습니다. 헤지펀드를 오랫동안 운용한 저자의 투자경험이 헤지펀드에 대한 편견을 바꾸어줄수도 있습니다. 

<투자전쟁>은 여느 투자서적과는 그 품격이 다릅니다. 바턴 빅스는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이야기했고, 투자생활에서 축적된 함의들을 문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바턴 빅스의 가문은 소위 말하는 월스트리트 로얄패밀리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뉴욕 은행의 최고 투자책임자이자 수많은 주식회사의 이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그의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 경제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 셋이 18세가 되었을 때, 전체 자산 구성의 합계 금액이 대략 15만 달러가 되는 포트폴리오를 주어 경험을 쌓게 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당시 최고의 리서치 회사이던 베이커 위크스를 운영했고, 남동생 제레미는 예일대와 런던정경대 LSE에서 공부하고 유에스 스틸 앤 카네기 연금 펀드를 운용했으니 월스트리트 로얄패밀리라고 지칭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학시절 미식축구선수였던 바턴 빅스는 소설을 쓰려는 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예일 대학교 경영학과를 1955년 6월에 수석 졸업한 바턴 빅스는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됐습니다. 정찰 임무를 좋아했고 침투 및 탈출 교육 프로그램을 좋아했다고 해요. 

육체적인 훈련과 운동을 즐겼다는 말이지요.

바턴 빅스는 전역 후 랜든에 있는 예비 학교에서 짧은 기간 동안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또 세미프로 팀에서 미식축구를 하며 소설 쓰기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서히 미식축구도 싫증이 났고 출판사들로부터 퇴짜를 맞는 일로 지겨워진 그는 아버지에게 투자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바턴 빅스는 1961년에 E.F.휴턴이라는 회사에 분석가로 취직하면서 처음으로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여 놓게 됩니다.

E.F.휴턴의 대표이던 실반 콜먼은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기 때문에 취직할 수 있었다고 바턴 빅스는 술회합니다. 소위 '금수저'의 덕을 본 셈이라고 바턴 빅스는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1964년 초까지 3년 동안 E.F. 휴턴에서 분석가로 일한 바턴 빅스는 1965년 6월 딕 래드클리프와 970만 달러로 페어필드 파트너스를 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73년 5월 모건 스탠리는 그에게 연구조사 및 투자관리를 할 팀을 조직할 것을 의뢰했고, 바턴 빅스는 이 조직을 30년 동안 지휘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턴 빅스는 최고 투자 전략가로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드디어 2002년 말, 바턴 빅스는 많은 고민과 토론 끝에 마드하브 다르와 시릴 물-베르토와 함께 헤지펀드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여 헤지펀드 "트랙시스 파트너스"를 설립합니다.

이 펀드의 운용자금은 1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운용 경험들은 투자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 같습니다. 

옥에 티라면 번역입니다. <주식 투자의 심리학>을 번역한 바 있는 역자는 이 책에서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번역판이 나와 있는 저 유명한 <증권분석>을 <유가증권분석>으로,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을 <어느 투자자의 회상>으로 번역 인용합니다.

번역본이 이미 나와 있을 때는 직역하지 않고 번역명을 따르는 것이 관례임에도 제목을 바꾸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